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이두비(吏讀碑)
-신라고비-
신라고비
마을주민이 발견한 매장문화재
이 비(碑)는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에 사는 마을주민이 밭갈이 도중 발견하여 1989년 4월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발견된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신라고비(新羅古碑)이다.
영일(迎日) 지역(地域)은 신라(新羅)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神光面)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碑)가 발견된 냉수리(冷水里)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郡內)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
3면에 새긴 삼면비 |
마모 없고 육안으로 판독가능
비문(碑文)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마모됨이 거의없고 육안으로 거의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자체(字體)는 대체로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서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비(碑)에는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부대표(칠왕(七王):사훼부(沙喙部)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사덕지아우지(斯德智阿于支)·자숙지거벌우지(子宿智居伐于支), 훼부(喙部)의 이부지일우지(이夫智壹于支)·지심지거벌우지(只心智居伐于支),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우지(頭腹智于支),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우지(暮斯支于支))가 모여 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전대의 두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王敎)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유지우지(臾支于支)·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 "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는데 비문에 나오는 "계미(癸未)"라는 우지(于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이 있어 좀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각부 귀족 참여 중신회의..화백제도 |
재산분배를 확인해 주는 특징 |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금석문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국보 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 국보 33호),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 국보 198호),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 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국보 242호),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 보물 517호) 등 매우 드문데 이 영일냉수리신라비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있어 신라사(新羅史)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당시 신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언급..
초기율령체제
특히 이 비(碑)는 국가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 사기의 기록을 방증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며 신라사 연구와 한자의 전개, 금석학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 문헌 사료로 메울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이두비(吏讀碑)
-신라고비-
신라고비
마을주민이 발견한 매장문화재
이 비(碑)는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에 사는 마을주민이 밭갈이 도중 발견하여 1989년 4월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발견된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신라고비(新羅古碑)이다.
영일(迎日) 지역(地域)은 신라(新羅)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神光面)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碑)가 발견된 냉수리(冷水里)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郡內)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
3면에 새긴 삼면비 |
마모 없고 육안으로 판독가능
비문(碑文)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마모됨이 거의없고 육안으로 거의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자체(字體)는 대체로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서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비(碑)에는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부대표(칠왕(七王):사훼부(沙喙部)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사덕지아우지(斯德智阿于支)·자숙지거벌우지(子宿智居伐于支), 훼부(喙部)의 이부지일우지(이夫智壹于支)·지심지거벌우지(只心智居伐于支),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우지(頭腹智于支),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우지(暮斯支于支))가 모여 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전대의 두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王敎)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유지우지(臾支于支)·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 "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는데 비문에 나오는 "계미(癸未)"라는 우지(于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이 있어 좀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각부 귀족 참여 중신회의..화백제도 |
재산분배를 확인해 주는 특징 |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금석문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국보 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 국보 33호),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 국보 198호),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 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국보 242호),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 보물 517호) 등 매우 드문데 이 영일냉수리신라비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있어 신라사(新羅史)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당시 신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언급..
초기율령체제
특히 이 비(碑)는 국가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 사기의 기록을 방증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며 신라사 연구와 한자의 전개, 금석학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 문헌 사료로 메울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이두비(吏讀碑)
-신라고비-
신라고비
마을주민이 발견한 매장문화재
이 비(碑)는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 냉수리(冷水里)에 사는 마을주민이 밭갈이 도중 발견하여 1989년 4월 문화재청(당시 문화재관리국)에 발견된 매장문화재로 신고된 신라고비(新羅古碑)이다.
영일(迎日) 지역(地域)은 신라(新羅)가 동해안으로 진출하는 전초기지였으며 한동안 왜(倭)·고구려(高句麗)의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던 곳인데 신광면(神光面)은 안강(安康)·청하(淸河)·흥해(興海)를 잇는 교통의 요지이며 특히 비(碑)가 발견된 냉수리(冷水里)는 곡강천과 형산강 지류의 분수령에 해당되는 곳으로 부근 흥곡리에는 군내(郡內) 최대의 고분군이 있고 "진율예백장(晋率濊伯長)" 동인(銅印)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
3면에 새긴 삼면비 |
마모 없고 육안으로 판독가능
비문(碑文)은 단단한 화강암에 새겼기 때문에 마모됨이 거의없고 육안으로 거의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자체(字體)는 대체로 해서체(楷書體)로 보이나 예서체(隸書體)의 기풍이 많이 남아 있어 비문의 형태와 서체면에서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매우 유사하다.
비(碑)에는 "신라의 사부지왕(斯夫智王:실성왕)·내지왕(乃智王:내물왕) 두왕이 진이마촌(珍而麻村:현재 돌막골로 불리고 있음)의 절거리(節居利)에게 재산 취득을 인정하는 교(敎)를 내렸다. 계미년(癸未年:503년) 9월 25일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지증왕) 등 일곱 사람의 각부대표(칠왕(七王):사훼부(沙喙部)의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사덕지아우지(斯德智阿于支)·자숙지거벌우지(子宿智居伐于支), 훼부(喙部)의 이부지일우지(이夫智壹于支)·지심지거벌우지(只心智居伐于支), 본피부(本彼部)의 두복지우지(頭腹智于支), 사피부(斯彼部)의 모사지우지(暮斯支于支))가 모여 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전대의 두왕이 절거리에게 재물을 얻도록 왕교(王敎)를 내린 것을 의논하여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교시(別敎)를 통해 절거리가 먼저 죽으면 그의 재산은 {아우인 아사노(弟兒斯奴) 혹은 아우의 아들인 사노(斯奴)}가 상속하게 되며 말추(末鄒)와 사신지(斯申支) 이 두 사람은 후에 재물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말것을 명령하였다. 만약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는 자에게는 중죄에 처할 것이다. 전사인(典事人) 7명은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하늘의 뜻을 물어 이 사실을 기록한다. 촌주 두 사람(유지우지(臾支于支)·수지일금지(須支壹今智))이 이해의 일을 마치고 그 사실을 적는다. "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는데 비문에 나오는 "계미(癸未)"라는 우지(于支)와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등 각종 신분명칭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과 연관지어 볼 때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으로 추정되나 학자들간의 이견(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이 있어 좀더 구체적인 고증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각부 귀족 참여 중신회의..화백제도 |
재산분배를 확인해 주는 특징 |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금석문 중에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 국보 3호),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 국보 33호),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 국보 198호),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 국보 205호),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 국보 242호), 영천청제비(永川菁堤碑 : 보물 517호) 등 매우 드문데 이 영일냉수리신라비는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있어 신라사(新羅史)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는데 대단히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당시 신라 정치·경제·사회·문화 언급..
초기율령체제
특히 이 비(碑)는 국가에서 세운 것으로 당시 신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을 언급하고 있고 왕명을 다룬 초기 율령체제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삼국 사기의 기록을 방증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며 신라사 연구와 한자의 전개, 금석학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할 수 있어 문헌 사료로 메울 수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