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신광비학산학 정보화마을

  • HOME
  • 마이인빌
  • 메일
  • 고객센터
  • 사이트맵
  • 마을안내 마을체험 마을장터 마을여행 마을공간

    우)37522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길37번길 13
    대표전화 : 054-240-7590 / FAX.054-240-7912

    초롱이

    ○ 연혁

    삼국시대 신라초기 동잉음현(東仍音縣 일명 神乙)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6년(757) 신광현(神光縣)으로 개명하여 의창군(義昌郡)의 영현이 됨, 이후 어진(於鎭)으로 개칭
    고려시대 태조 13년(930) 친히 행차한 후 신광진(神光鎭)으로 개칭, 현종 9년(1018)에 경주부의 속현이 됨
    조선시대 신광현으로 경주부의 임내
    1669년 전후 : 8면(邑內·夫山·驛·古縣·南·舊邑·西·北面)
    - 1789년 : 면리제(面里制) 실시로 22리를 관할하는 신광면이 되어 경주부의 직속 행정구역으로 편입됨 
    - 1895년 5월 26일 : 전국 행정단위의 군제개편시 경주군의 행정구역으로 동래부의 관할이 됨 
    - 1896년 8월 4일 : 경주군의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의 관할이 됨
    - 1906년 9월 24일 : 경주군의 행정구역이었던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편입됨
    일제강점기 - 1912년 1월 : 24리동 관할
    - 1914년 3월 1일 : 24동이 13동으로 통폐합, 면사무소 : 토성동
    대한민국시대 - 1988년 5월 7일: 洞을 里로 개정
    - 1990년 1월 16일 : 호리리(虎里里)를 호리(虎里)로 개정
    - 1994년 10월 말 현재 : 법정리 13, 행정리 22리, 면사무소 : 토성 1리 340-3번지

    ○ 지명유래

    › 신광(神光)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법광사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날밤 비학산에서 밝은 빛 줄기가 찬란하게 뻗어나와 이를 보신 왕이 신령스러운 빛이라고 여기고 이 지역을 신광(神光)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하여 그때부터 신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함.

    › 냉수리(冷水里)

    어떤 대감이 무더운 여름날 길을 가다 목이 말라 주막에서 앞 냇가의 물을 얻어 마셨다. 그런데 그 물이 너무 차가와서 이 동네 이름을 냉수(冷水)라 불렀다.

    새터
    냉수2리에 속하는 마을로 새마을과 용바위골 못 사이에 새로 생긴 마을 이라 하여 새터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두 가구가 고추, 감자 등을 재배하여 살고 있다.

    모골,방곡(方谷)
    냉수리에 있는 소매기못(龍泉池)에서 남쪽으로 1km쯤 떨어진 산모퉁이 양지쪽에 형성되어 있었던 마을로 산모퉁이에 있다하여 모골이라 불렀다 하며 지금은 주민은 없고 폐가가 한채 남아 있다.

    새각단
    소매기못에서 남쪽으로 1.5km쯤 떨어진 경주시 강동면 포항시 북구 신광면 , 기계면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곳곳에 모여든 사람들이 새로 마을을 형성했다 하여 불리우게 되었음. 흔히들 우스개 소리로 무더운 여름날의 정자나무 밑에서 2개시 3개면 사람들이 모여서 논다고 한다.

    새마을(新里)
    냉수2리에 속하는 마을로 인근 우각에 여강이씨들이 세거하고 있었는데 터가 좁아 그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로 마을을 이루어 살게 되면서 새마을 혹은 신리라 불리게 되었음.

    용천리(龍泉里)
    냉수1리에 속하는 마을로 마을 근처에 있는 용바위골에 샘이 있어서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설화가 있음. ※ 옛날 신리마을 어느 집안에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젖을 주지 않아도 울지 않고 잘 놀았다. 하루는 아기어머니가 이웃집에 일을 도와 주고 집에 돌아와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아기가 시렁위에 올라갔다 벽을 타고 내려 오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고있어 이를 보고 놀란 어머니가 가족에게 이야기하고 아기가 잠을 자는동안 아기의 겨드랑이를 보니 날개가 돋아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아기장군이라 여기고 장군이 나면 역모를 꾀한다는 두려움에 안방에 콩 한 섬을 얹어 아기를 눌러 죽이려 했으나 아기가 이것을 떨치고 일어나므로 다시 안방 위에 콩 두섬을 쌓아 눌렀더니 하루가 지나서야 숨을 거우었는데 사흘 후 용천리 뒷산에서 주인을 잃은 용마가 나타나 사흘동안 슬피 울다가 서쪽인 마조쪽으로 날아났다는 전설이 있다.

    주마각단, 주막거리, 냉수주막, 주막(酒幕)
    아주 옛날에는 석두동이라 불리 다가 조선조 말엽 경상감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회나무 정자밑에 않아 쉬던중 목이 말라 찬물을 청하여 마시고는 영천과 청하의 길목으로 주막이 있어서 주마각단이라 불러지고 있음.

    › 흥곡리(興谷里)

    옛날 어느 선비가 이 마을을 지나다가 장차 부흥할 것이라고 해서 흥곡이라 했다.

    당내(當內)
    옛날 이 마을 주위에 당나무가 많이 있어 당나무 숲속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칭하여졌다.

    골안골, 원흥골, 원흥곡(元興谷)
    계곡안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골안골이라고 하던 것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내 마조를 병합하여 흥곡리이라고 하게 하자 이곳이 원래의 흥곡이란 데서 원흥곡이라 부른다고 한다.

    마조, 마주
    옛날 이 마을에 삼밭이 많이 있었다 하여 마전(麻田)이라 부르던 것이 어느덧 마주(麻走, 麻助)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 우각리(牛角里)

    옛날에는 우각(愚角)이라 하였으나 이 마을 뒷산 도음산을 중심으로 좌우형상이 누워있는 소의 뿔과 같다하여 우각이라 불렀다.

    송동(松洞)
    1리와 2리사이 송림이 울창한가운데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송동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지금은 빈집 한 집이 있으며 마을이라기 보다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장당(長堂), 장댕이
    지금의 우각2리이며 옛날 기정승이란 부자가 살았는데 그 집에 긴 사당이 많아 장당이라 불렀음.

    › 죽성리(竹城里)

    1914년 죽동(竹洞)과 중성(中城), 시룻골을 합하여 죽성(竹城)이라 불렀다. 원래의 중성은 없어 지고 시룻골을 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댓골, 죽성
    옛날 이 마을 주위에 대나무가 울창하여 댓골이라 불렀다고 하나 동리에 불이 나서 지금은 몇 곳에 흔적만 남아 있으며 또 조선조 때에는 역원의 소재지로 영천, 경주, 반곡 등 각 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시리골, 중성(中城)
    댓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한 골짜기에서 떡을 만드는 시루를 만들었다고 하여 시리골이라 하며 또 토성과 죽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 상읍리(上邑里)

    옛날 신광현의 소재지가 토성이 있을 때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상읍이라 하였다.

    드문다리, 절안, 법광(法廣)
    이 마을은 한곳에 모여있지 않고 드문드문 떨어져 있다고 해서 드문다리라하며 또 신라 법흥왕 때 세운 법광사(法廣寺)라는 절이 법광이라 하기도 한다.

    › 토성리(土城里)

    신라와 고구려가 옛재를 분계선으로하여 서로 대치하던 옛 시절에 흙을 구워서 만든 성터를 중심으로 성내 장터, 윗각단, 샛각단, 비선거리, 너매각단, 그리고 앞걸(南川) 건너에 갱빈 마을들을 합하여 1914년 토성리라 하였다. 아직도 신광중학교 부근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사정리(士亭里)

    1914년 사미(士美), 모정(茅亭), 가척(加尺)을 합하여 사정이라 했다. 1리에는 가척, 안모정, 바깥모정, 2리에는 사미의 웃돔, 아랫돔이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가 근년에 개설되었다.

    가척(加尺)
    이 마을 주위의 지형이 자와 같이 곧을 뿐만 아니라 마을 형성 당시 인가가 지형을 따라 자의 눈금처럼 띄엄띄엄 자리잡아 형성되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가척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음.

    모정(茅亭)
    옛날 이 마을위에 금잔디가 많은 숲속에 정자가 있어 모정이라 불렀다 하며 또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떼집을 짓고 은거하였다 하여 모정이라하였다고도 함.

    새미, 사미
    약 200년전 청하 현감이 부임하여 순시차 이곳에 와보니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많이 들려와 마을 이름을 사미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그렇게 부르던 것이 어느덧 새미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후에 이 마을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한다.

    › 안덕리(安德里)

    1914년 안지(安地)와 지덕(地德)을 합하여 안덕(安德)이라 하였는데 자연부락으로는 2리에 못산, 개척당, 큰마을, 딱밭골이 있고, 1리에 못안, 안마을, 황토골, 안지(安地) 등이 있으며 특히 야치마을(안마을)은 목축업 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야치마을, 못안
    옛날 마을 옆에 올야지라는 못이 있고, 그 주위에 산이 있었는데 5개의 산 봉우리가 못으로 향하고 그 능선이 못에 속한다고 하여 못안 또는 야치마을이라 불렀다 한다.

    황토골
    올야지 및 서족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가 황토로 되어 있고 이 마을을 대부분의 밭이 황토이므로 황토골이라 불렀다.

    안지(安地)
    옛날 마을 안쪽에 큰 굴이 있어 외적의 침략이 있을 때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안지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딱밭골
    옛날에는 딱나무 밭이 많고 딱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딱밭골이라 불렀다.

    못산
    이 마을을 터가 못이었는데 대홍수로 말미암아 못이 산과 같이 되고 거기에 동네를 형성 하였다고 하여 못산이라 부른다.

    큰마을
    옛날 마을이 형성될 때 4개 마을중 가장 크므로 큰마을이라 불렀음.

    오라지
    이 마을 주위의 지형이 야자모양이 5개나 되었다 하여 오야지라고 부르다가 어느덧 오라지라 부르게 되었다.

    개척당
    광복후 난민정착사업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개척당이라 부름.

    › 만석리(萬石里)

    입석과 구만의 명칭을 합한 것에서 만석이 유래했다.

    선돌(立石)
    마을의 서쪽에 9척 가량의 큰 돌이 서 있기 때문에 선돌이라 칭하게 되었다.

    구만(九萬)
    마을 주위에 반달형상의 언덕에 큰 물이 지난 듯한 굽이가 있어 굽안이라고 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부르기 쉽게 구만이라 하였다는 설과 또 신라 때 경주에서 쓸 큰 돌을 끌고 가다 이곳에서 쉬고 있는데 오라는 전갈이 있어 그만 가자고 하여 부른 것이 구만이라는 설이 있다.

    › 반곡리(盤谷里)

    이 마을앞에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많아 반곡이라 불리어 왔으나 옛 마을은 반곡지에 수몰되어 지금의 마을은 1944년경에 높은 곳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라 한다.

    쉿골(金谷)
    마을계곡에서는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많이 나오고 있으므로 쇠골이라 부르고 있다.

    엿재
    이 마을 뒤에는 청하면 명안리로 통하는 큰 고개가 있는데 옛날에는 도둑과 짐승이 횡행하여 열 사람이 같이 넘어야 무사히 넘을 수 있다 하여서 열재라하던 것이 부르기 쉽게 엿재라 호칭 되었음.

    › 기일리(基日里)

    마을이 비학산 뒤 양지 바른 따뜻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터일이라 부르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학전동을 병합하여 기일이라 해서 신광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평장골(平章)
    고려때 이 마을에 평장사가 났다고 하여 평장골이라 부름.

    아랫마을
    비학산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학전동이라 부르다가 기일리에 병합되면서 기일리 첫 관문인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아랫마을이라 부름.

    새터
    이곳에 학교와 인가가 새로 생겨 새터라 불렀다.

    오금당, 올금당
    비학산 북쪽 산골짜기에 맑고 깊은 샘이 있었는데 여기서 용다섯 마리가 승천하였다 하여 오용탕이라 불려져 오다가 차츰 변음되어 오금당 또는 올금당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다.

    › 마북리(馬北里)

    비학산 지령에 많은 말 발자국 모양의 흔적이 있어 그 고개를 말발지재라 하였는데 지금부터 약 500년전 아랫마을인 반곡리는 말을 먹이던 역촌으로 말을 기르고 있었으나 마초가 많이 자라지 않아 역촌의 말을 기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배가 고픈 말들은 자주 북쪽 비학산 지령으로 도망쳐 풀을 뜯어 먹고 돌아 다니게 되니 이 곳에는 말발자국이 온 산등성이 에 깊이 패어 모양이 남게 되었고 말발지개 북쪽에 있다 하여 마북이라 불러지게 되었다.

    땅부등, 당수동(當樹洞, 當代嶝)
    옛날에는 이 마을 뒷산에 느티나무가 많이 우거져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하며 지금부터 400여년전 인동장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이곳을 찾아와 정착할 때 뒷산에 있는 가장 큰 느티나무 아래에 제수를 차려 놓고 마을을 태평을 빌었는데 그후 이 나무는 마을의 당수목으로 정해져 내려왔고 따라서 동네이름도 당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그런데 주민들이 우거진 느티나무를 벌채하여 전국 여러 곳의 가구점에 비싸게 팔게 되니 앙수목도 없어지고 땅의 뿌리부분에 등걸만 남게 되었는데 그 뒤 마을 이름을 땅부등 이라 불렀다함.

    › 호리(虎里)

    300여년 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며 마을 옆에 있는 호두산이 마치 범의 머리와 같이 생겼고 범 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어 마을의 재앙과 악을 물리쳐 준다 하여 주민들은 이 범 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이라 믿었고, 이 마을의 이름도 범촌 또는 호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1953년경 이 마을앞에 면적이 87ha나 되는 큰 저수지가 만들어져 마을은 산기슭에 3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다.